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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에 맞섰던 군인들, 그들은 지금? / 2005

by protocooperation 2015. 12. 6.

1212 쿠데타에 맞섰던 분들에 대한 기사였는데 쉽게 정리가 된 글이어서 예전 블로그에 담아놨던 기사. 



출처 : 미디어다음 / 오미정 기자 2005.6.5(일) 10:23

 

쿠데타 세력과 그에 맞선 사람들은 80년 이후 서로 다른 길을 걸을 수 밖에 없었다.
1979년 12.12 쿠데타를 주도했던 세력들은 쿠데타 이후 전두환 노태우 정권에서 권력의 최정점에 오르며 승승장구한다. 95년 5.18 특별법 이후에도 형식적인 처벌만 받은 뒤 바로 사면 복권돼 정ㆍ재계, 군 등에서 요직을 두루 섭렵하며 한국 사회의 주류를 형성해 왔다. 

하지만 12.12당시 군인정신으로 쿠데타에 맞섰던 사람들의 인생은 이와 사뭇 다르다. 일부는 아직 정당한 역사적 평가조차 받지 못한 채 잊혀졌다. 

직속부하에 의해 보안사에 끌려간 장태완 당시 수경사령관은 최근까지 인고의 세월을 살았다. 신군부 세력에 가담하지 않았던 정승화 당시 육군참모총장 역시 17년간 불명예 속에 살다 지난 97년 내란방조 혐의에 대해 무죄 판결을 받고 명예를 회복했다. 쿠데타 가담 권유를 뿌리치고 저항했던 정병주 특전사령관과 그를 보좌하다 현장에서 목숨을 잃은 김오랑 중령도 12.12의 피해자들이다.

장태완 사령관 아버지, 충격으로 세상 떠

장태완 당시 수경사령관은 자신의 휘하에 있던 부하들에 의해 수경사를 함락당한 후 80년 2월 강제 예편 당한다. 이 때는 이미 50여일간 감방 생활을 한 후였다. 

그의 아버지는 TV를 통해 보안사로 끌려가는 아들의 모습을 보고 충격으로 식음을 전폐한 채 버티다 4개월 만에 세상을 등졌다. 82년에는 그의 아들이 할아버지 산소 앞에서 변사체로 발견됐다. 그 역시 심장병을 얻어 미국에서 대수술을 받고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군사 정권 하에서 고초를 당하다 94~2000년 재향 군인회 회장을 맡으면서 명예회복을 시작했다. 2000년 16대 민주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장태완 사령관은 후에 사석에서 “전두환 편보다는 배신자들을 더 증오한다. 초저녁에 ‘장 장군 파이팅‘이라고 응원하던 장성들이 자정 무렵에 태도를 바꿨다”며 12월 12일 저녁 배신한 장성들에 대해 강한 분노를 표현한 바 있다.

정승화 총장, 97년에 17년 만 명예회복

정승화 당시 육군참모총장은 12.12 후 보안사에 끌려가 고문까지 당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는 그 때부터 97년까지 17년을 전과자라는 낙인이 찍힌 채 불명예 속에 살게 된다. 박정희 대통령의 시해 장소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시해를 방조했다는 혐의로 80년 징역 10년을 선고 받았기 때문이다. 97년 서울지방법원이 그의 내란방조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면서 예비역 육군대장으로서 모든 권리를 회복한다.

명예회복과 함께 17년간 받지 못했던 군인 연금을 되찾았고 사후 국립묘지에 안장될 자격도 다시 얻었다. 2002년 지병으로 사망한 그의 유해는 대전 국립 현충원에 안장됐다. 그의 묘소는 12.12의 반란 주역 중 한 명인 유학성 씨(97년 사망)의 묘소와 지척거리여서 또 한번 악연을 상기시키고 있다.

정병주 사령관, 의문의 자살 시체로 발견돼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12.12 당시 직속 부하인 최세창 준장의 3공수여단 제 15대대 병력에 의해 왼팔에 총상을 입고 체포됐다. 정 사령관은 총상 치료를 위해 입원해 있던 80년 1월 강제 예편당한 후 5개월간 가택 연금을 당한다. 이후에도 보안사의 감시 하에서 모진 생활을 이어간다. 80년대 말 5공 세력이 국영 기업체 사장 자리 등을 제안하지만 모두 거절하고 군인으로서 명예를 따른다.

정 사령관은 89년 경기도 양주의 한 야산에서 목을 맨 시체로 발견된다. 당시 수사기관은 그의 죽음을 자살로 결론지었다. 하지만 유족들은 ‘자살로 위장된 타살’이라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유족들은 그 근거로 ▲고인의 유서가 발견되지 않은 점 ▲고인의 독실한 천주교 신자라는 점 ▲12.12 진상 규명을 위해 활발한 활동을 펼쳤던 점 등을 들고 있다. 
유족들은 그의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요청하는 절차를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지인들은 전하고 있다.

김오랑 중령 사망 후 가정 풍비박산

정병주 사령관의 비서실장이었던 김오랑 중령은 12.12 당시 정 사령관을 보좌하며 항전하다 최세창 준장 휘하 박종규 중령이 이끄는 부하들에 의해 집중 총격을 받고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그의 시체는 특전사 뒤 야산에 암매장됐다가 80년 2월 국립묘지에 안장됐다. 
김 중령 사망 이후 그의 집안은 풍비박산 난 것으로 전해진다. 김 중령의 어머니는 81년 막내아들을 잃은 슬픔을 안은 채 세상을 떠났다. 

아내 백영옥 씨는 비명에 간 남편의 소식을 듣고 일주일 만에 충격으로 실명하고 만다. 백 씨는 91년 6월 부산에서 실족사 한 후 현재 부산의 한 무연고 납골당에 안치돼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가족 역시 김 중령 사망 후 줄곧 군사 정권의 감시를 받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