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 때 블로그에 담아놨던 2005년 한겨레 기사.
학생으로서의 자세를 배우는데 많은 참고가 됐던 내용.
[한겨레21 2005-08-12 18:06]
[한겨레] 방대한 자료 수집과 정확한 분석으로 <한국의 재벌> 완성한 김진방 교수
에버랜드 전환사채·두산그룹 형제 분쟁 등의 배경도 상세히 파헤치다
▣ 김영배 기자 kimyb*hani.co.kr *는@마크
배달돼온 책을 건네받는 순간 우선 기가 질렸다. 쇼핑백을 하나 가득 채운 두툼한 다섯권짜리 연구서의 물리적인 무게감에 짓눌려 공부는커녕 읽어볼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개략적인 소개글과 머리말을 읽는 데서 그쳤을 뿐 본문으로 선뜻 나아가질 못했다.
연구 작업은 자료 수집을 위한 전쟁
진보 성향 경제학자들의 모임인 참여사회연구소와 인하대 산업경제연구소 공동기획으로 나온 <한국의 재벌>(1~5권)은 1999년에 출간된 <한국의 5대재벌 백서>의 후속작이다.
1997년 이후(2003년까지) 상황을 반영한데다 분석 대상 그룹을 30대로 넓혀 ‘한국 재벌의 모든 것’이라고 말하기에 손색이 없을 듯하다. 재벌의 경제력 집중 과정, 재무구조 및 소유구조의 변천사를 망라하고 있다. 4, 5권에 실린 재벌의 인맥·혼맥, 노사 관계와 사회적 쟁점은 일반인들에게도 흥미롭게 읽힐 법하다. 때마침 두산그룹 ‘형제의 난’, 옛 안기부 불법 도청 테이프(X파일)에서 드러난 ‘삼성그룹의 대가성 대선자금 지원 논의’로 재벌 체제의 폐해가 고스란히 드러나 재벌에 대한 관심도 새삼 높아져 있다.
연구 기획에서 최종 산출까지 3년 이상 지고 있던 무거운 짐을 벗어낸 홀가분함 때문이었을까. 연구 작업의 실무 총책임을 맡은 김진방(47) 교수(인하대 경제학부)의 표정이 밝아 보였다.
볼이 쏙 들어갈 정도로 초췌한 모습일 걸로 생각했는데, 말짱하시네요.
“(웃음) 원고 마감은 올 4월에 대략 끝내고 그동안은 마무리 작업을 해왔습니다.”
출간 시기를 조정한 것인가요? 재벌 문제가 막 터져나온 때와 겹친 듯해서….
“두산 사태나 삼성 공화국 논란, 이런 것을 염두에 둔 것은 전혀 아닙니다. 이번 연구가 한국학술진흥재단 지원사업의 하나로 시작됐는데, 3년 기한이 끝난 게 7월 말입니다. 우연히 그렇게 겹쳤네요.” 이번에 나온 재벌 연구의 뿌리는 199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외환위기로 재벌 문제가 집중적으로 불거지면서 참여사회연구소 경제분과의 활동은 자연스럽게 재벌 문제로 집중됐다. 그 활동의 하나로 재벌백서를 발간하자는 구상이 나오고, 이듬해 결실을 맺었다. 당시 5대재벌 백서 발간을 주도적으로 이끈 이는 참여사회연구소 소장을 맡고 있던 김균 고려대 교수(정경학부)였다. 이때 참여한 연구진이 거의 그대로 이번 연구작업에도 참여했다.
<5대재벌 백서>가 <한국의 재벌>로 확대·발전되는 과정이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2001년쯤에 5대재벌 백서를 한번 더 만들어보자는 논의가 있었습니다. 애초 백서는 1995~97년 3년을 다루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워낙 방대한 작업이어서) 엄두를 내지 못해 미뤄졌습니다.” 그렇게 시일을 끌던 중 학술진흥재단의 기초학문 육성사업으로 채택됨에 따라 연구 작업은 활기를 띠게 됐다. 분석 대상을 5대재벌에서 30대재벌로 넓힌 것도 여기에 힘입은 바 컸다. 2002년 초 방대한 연구계획서가 마련되고 그해 8월부터는 본격적인 연구 작업이 시작됐다.
연구 작업은 한마디로 ‘자료 수집을 위한 전쟁’이었다. 예전보다는 나아졌다고 해도 재벌 관련 자료를 모으는 일은 번번이 벽에 부딪쳤다. 금융감독원의 인터넷 사이트에서 얻을 수 있는 사업보고서나 감사보고서는 1999년 이후 것뿐이어서 그 이전 자료는 공인회계사회나 국회도서관으로 발품을 팔아야 했다. 이보다 더 난감한 일은 자료 사이의 일관성 문제였다. 예컨대 어떤 총수가 1997년 말에는 계열사 주식을 갖고 있었는데, 98년 1월1일로 넘어오면 갑자기 없는 걸로 나타났다. 이런 경우 1~2년 전 자료를 다시 뒤져 보거나 신용평가회사의 자료를 비교해서 오류를 고쳐 일관성을 회복하는 절차를 거쳐야 했다.
부정확한 통계와 분석에 일침을 날리다
재벌 연구는 이미 많이 이뤄졌는데, 이번 연구물의 의미는 뭐라고 볼 수 있나요?
“재벌에 대한 과학적 연구의 기초를 마련했다고 감히 자부합니다. 이번 연구는 비교적 정확하고 적절한 통계를 바탕에 깔고 있습니다.” 기존 연구는 적잖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는 뜻인데, 김 교수는 이를 두 부류로 나눠 설명했다.
우선, 추상적인 이론과 일상적인 관찰에 따라 재벌 체제에 대한 결론을 성급하게 이끌어낸 경우가 많다는 점이 꼽혔다. 자유기업원장을 지낸 공병호 박사, 한국경제연구원장으로 재직한 좌승희 박사를 이런 범주에 넣을 수 있다고 김 교수는 지적했다.
이들 우파 연구자 못지않게 좌파쪽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발견된다는 게 김 교수의 견해다. 발전국가론적 사고(한국 경제는 여전히 1970∼80년대식의 산업정책과 국가의 역할이 필요하고, 그 국가의 역할을 전달하는 장치로서 재벌이 유의미하다는)에서 재벌에 대한 견해를 이끌어내는 대안연대가 한 예다. 이념의 좌우를 떠나 이들의 공통점은 현실을 명확히 파악하기 위한 자료 발굴 없이 이론을 펴는 경우가 많다는 주장이다. 기자에 빗대면, 현장 취재 없이 고정된 틀에 따라 기사를 쓰는 격이란 뜻으로 들렸다.
또 하나는, 부정확하고 부적절한 통계와 분석 기법을 쓰는 오류가 있다는 것이다.
조성욱 서울대 교수가 한국개발연구원(KDI) 재직 시절 내놓은 ‘기업지배구조와 수익성’ 보고서가 한 예다. 이 보고서는 외환위기 이전 5년간 약 5천개 외부 감사 대상 기업을 대상으로 기업 수익성 변화를 분석해 “지배주주와 특수관계인의 지분이 낮을수록 기업 수익성이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혀 주목을 끈 바 있다. 김 교수는 이 보고서에 대해 “정확한 기법을 사용했고 결론도 올바른 것으로 판단되지만, 통계의 정확성과 적절성에선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신용평가회사의 자료를 활용했기 때문에 빠진 게 많고, 총수 일가의 지분만 집계돼 계열사 지분까지 감안한 온전한 의미의 소유-지배 괴리를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나마 이는 양호한 예로 꼽히며, 삼성경제연구소의 경우 지난해 의도적으로 여겨지는 문제성 모형 설정을 통해 거꾸로 된 결론(소유-지배 괴리와 기업 성과 사이의 관계)을 이끌어내기도 했다고 김 교수는 덧붙였다.
이번 연구와 조사에서는 그런 문제가 해소됐다는 뜻인가요.
“제가 맡은 재벌의 소유구조를 예로 들어보면, 우선 신용평가회사의 자료에 의존하지 않고, 해당 회사의 사업보고서·감사보고서를 모두 뒤졌습니다. 업체 수로는 700개쯤 됩니다. 이렇게 원천적인 자료에서부터 다르며, 총수 일가뿐 아니라 총수 개개인의 지분을 파악하고, 계열사 출자 실태도 모두 포괄해 조사했습니다.” 이에 따라 총수 일가와 긴밀한 이해관계를 맺는 계열사가 어딘지를 명확히 파악할 수 있고, 소유-지배구조와 기업 성과의 관계 등을 통계적으로 정확히 분석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됐다고 김 교수는 설명했다. 가장 정확하고 풍부한 통계를 활용했다는 점에서 ‘과학적’이고, 추가 연구로 이어질 수 있다는 바탕이란 점에서 ‘기초’ 작업이라는 것이다.
이번 연구 작업을 벌이면서 김 교수는 이미 알고 있던 사항을 명확히 했을 뿐 아니라 몇 가지 의문을 확실히 푼 게 있다고 소개했다.
에버랜드가 지난 1996년 전환사채(CB)를 이재용씨 등 이건희 회장 자녀에게 싸게 넘긴 것과 관련된 헐값 논란에 명확히 쐐기를 박는 사실을 건져낸 게 한 예다.
김영삼 정권때 정부 통제를 벗어난 막강 권력
당시 에버랜드는 이재용씨 등에게 에버랜드 CB를 주당 7천원대에 넘겨 헐값 시비를 낳았다. 이는 현재 법정 다툼으로 번져 있을 뿐 아니라 이 회장 일가의 불법·변칙 경영권 세습 논란의 첫출발이자 핵심 고리로 꼽힌다. 김 교수가 이 대목에서 품은 의문은 이렇다. ‘이 회장 자녀에게 에버랜드 CB를 싸게 넘기면 에버랜드 주주인 <중앙일보>가 손해를 보는데, 그 사주인 홍석현(이건희 회장 처남)씨가 고스란히 떠안았을까?’ 의문은 삼성캐피탈, 삼성카드 감사보고서를 뒤지는 과정에서 해소됐다. 중앙일보사가 갖고 있던 에버랜드 지분은 삼성카드에서 10만원에 사준 것이었다.
이 회장 자녀에게 헐값으로 넘겼다는 걸 명백하게 보여주는 증거인 셈이다.
중앙일보사 보유 지분의 거래 가격이 10만원대라는 사실은 이번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처음 확인된 사실이다. 이건희 삼성회장이 삼성생명 주식을 차명으로 대거 보유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재차 확인됐다.
두산그룹 ‘형제의 난’ 배경을 이번 연구 성과물로 해석할 수도 있다고 김 교수는 설명한다. 두산그룹은 한국중공업, 고려산업개발 등을 인수해 덩치를 불리다 보니 총수 일가의 지분이 묽어졌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계열사간 순환출자를 늘리고 특정 기업에 오너 가족 지분을 집중하게 된다. 아버지 세대인 ‘용’자 돌림은 (주)두산에, 아들 세대인 ‘원’자 돌림은 두산건설에 몰아넣는 식이었다. 이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경영권을 승계하자는 의도였는데, 그룹의 핵심으로 떠오른 두산건설에서 박용오 전 회장쪽의 2세가 배제되면서 불안감을 느꼈다는 설명이다. 김 교수는 “지분 변동 과정을 보면, 박용오 전 회장쪽이 지분을 처분한 뒤 두산건설이 그룹의 핵심으로 떠올랐기 때문에 불만을 가졌을 법하다”고 말했다. 현대자동차를 비롯한 다른 재벌그룹의 2·3세 승계 과정에서도 두산그룹과 비슷한 문제가 나타나고 있다는 게 김 교수의 진단이다.
김 교수는 “재벌그룹은 김영삼 정부 시절 ‘세계화’에 따른 외자 도입 자유화 뒤 자금조달 면에서 상당한 자율성을 획득하면서 정부의 통제에서 벗어났다”며 “이제는 정치, 사회, 문화 영역까지 장악할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수준에 이르렀다”고 분석한다. 그는 “이번 X파일 사태에서 볼 수 있듯 삼성이 정치자금을 제공한 것은 반대급부가 아니라 자신의 영향력 확대를 위한 것이었다”고 덧붙였다.
게임의 룰 자체를 바꾸려는 행태
“재벌의 이해관계가 주주, 채권자, 피고용인, 거래업체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의사를 반영하는 게 아니라 소유 지배주주나 총수 일가의 이해만을 반영하는 건 위험합니다. 공적 권력의 집중도 문제지만, 사적 권력의 집중이 시민사회에 끼치는 해악이 훨씬 크다고 봅니다.” 삼성 같은 재벌이 게임의 룰(잣대)을 어기는 수준을 넘어 아예 룰 자체를 바꿔버리려는 행태에서 이를 엿보게 된다고 김 교수는 말한다. 한 예로 금융-산업자본의 분리가 바람직하다는 데 공감대가 이뤄져 있음에도 삼성은 전경련 등을 앞세워 끊임없이 이를 공격한다는 것이다.
“삼성과 이건희 회장에게 미국의 부호 록펠러, 카네기 일가가 어떻게 영광스런 가문이 됐는지를 보라고 하고 싶습니다. 자손에게 먹고살 ‘돈’을 물려줬지, ‘기업’을 물려주지는 않았거든요. 당대에서 끝냈습니다. 그래서 영광스런 가문으로 남았습니다.”
과학적이고 실증적인 재벌 연구를 중시하는 재벌 전문가. 이번 <한국의 재벌> 프로젝트에 참여한 40여명의 연구진을 하나로 묶어낸 그물코였을 뿐 아니라 제3권 <재벌의 소유구조>를 집필했다. 이번 프로젝트의 전편인 1999년의 <5대 재벌백서>에서도 소유구조 부분을 맡아 집필한 대표적인 재벌 전문가이자 재벌 개혁론자로 꼽힌다.
본래 전공인 경제 학설사, 경제학 방법론에서 재벌 문제로 관심을 돌린 건 10년 전인 1990년대 중반부터였다. “한국 경제의 성장과 함께 ‘국가의 후퇴’가 이뤄지고, 그 자리를 재벌이 차지하는 게 확연히 보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재벌 연구에 뛰어든 뒤 집중한 분야는 공정거래법상 소유구조 문제였다. 참여연대 경제개혁센터 소장이자, 이번 프로젝트의 제5권 <재벌의 노사관계와 사회적 쟁점>을 공동 집필하기도 한 김상조 한성대 교수는 그에 대해 “하나의 주제를 잡으면 몇년씩 파고드는, 치밀하고 신중한 스타일”이라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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