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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계의 일그러진 논문 자화상

by protocooperation 2016. 3. 11.

예전 블로그에서 옮김.(2006년)


지난해 9월 프랑스어문교육학회의 인터넷 홈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은 공고문이 실렸다. “A지에 게재한 논문 두 편이 ‘프랑스어문교육학회’ 학회지인 ‘프랑스 어문교육’ 16집과 17집에 각각 중복게재된 사실이 확인된 바, 다음 두 편의 논문이 삭제됨을 알려드립니다.”

해당 논문은 2003년과 2004년 프랑스어문교육학회지에 실렸다가 이미 이전에 다른 학술지에 실은 논문으로 판단돼 삭제된 것이다. 한국학술진흥재단과 프랑스어문교육학회는 이전 논문과 비교, 동일 논문 또는 유사 논문으로 확인했다. 두 논문 모두 동일한 저술자가 쓴 것이었다. 이 학회 관련 관계자는 “해당 저술자의 회원자격을 박탈했다”고 말했다.

한 논문은 해당 논문저술자를 포함한 3명의 저자가 함께 제출한 논문. 자신의 논문을 복제한 ‘자기표절’이 어느 정도 심각한 상태에 이른 것인가 보여준 실례다. 해당 논문저술자는 2005년 B대 교수에 채용돼 표절시비는 교수임용 의혹으로까지 번졌다. 임용심사 당시 제출한 연구실적 중 문제의 논문이 포함됐기 때문이다.

황우석 박사의 논문 조작 파문으로 학계의 논문 관행이 도마에 올랐다. 아무런 문제의식없이 관행적으로 이뤄진 논문조작, 타 논문 표절, 자기논문 표절, 공저 남발 등의 학계 풍토가 ‘파렴치한 학문적 범죄행위’를 정당화하는 토양을 만들어냈다고 할 수 있다.

논문 삭제로 결정된 한 학회지의 ‘자기표절’ 확인 사례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교수에서 제자로 이어지는 학술계의 도제식 문화가 내부 고발을 가로막기 때문에 논문 표절은 쉽게 문제화되지 않는다. 한 학회지에서 벌어진 사례의 경우 관련 기관에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한 결과 밝혀진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문제제기하면 ‘왕따’당하기 일쑤

 

전문적인 지식 없이는 논문조작과 타 논문 표절, 자기 표절 등을 분명하게 가려내기도 힘들다. 동일 학계에 몸담고 있는 연구자의 ‘감시’가 필요하지만 학계의 풍토상 문제를 제기를 하는 쪽이 오히려 ‘왕따’로 몰리기 일쑤다.

문학평론가인 이명원 교수(서울디지털대학교 문예창작부)는 1999년 국문학계의 원로인 김윤식교수의 ‘한국 근대소설사연구’가 일본의 문학평론가인 가라타니 고진의 ‘일본근대문학의 기원’을 표절했다고 지적, 학계에 파문을 일으켰다. 그는 원로학자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도리어 무형의 압력을 받아야 했다. 당시 서울시립대 박사 과정에 있던 이 교수는 이 파문으로 자퇴한 후 성균관대 국문과로 편입, 학위를 따는 파란만장한 과정을 거쳤다. 이 교수는 황우석 박사의 파문을 언급하면서 “학문에 있어서 사소한 과장이나 실수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면서 “논문에 대한 학계 내부의 자성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국문학처럼 문학잡지·학회지 등의 학문활동이 대폭 열려 있는 공간에서의 표절 평가는 그나마 나은 편이다. 아주 전문적인 영역이나 비대중적인 학문에 있어서는 전문가가 아니면 잡아낼 수 없는 ‘학문적 범죄’가 비일비재해도 잡아내기 힘들다. 설사 내부에서 문제를 발견하더라도 서로 눈감아 주는 풍토 속에서 ‘신고’를 할 곳도 마땅하지 않다.

교육부의 한 관계자는 “교육부 내에서 논문 표절을 다루는 부서는 없다”고 말하면서 “문화관광부로 알아보라”고 말했다. 문화관광부의 관련 부서는 저작권과. 음반·영상 등 창작물의 표절을 주로 다루는 곳이다. 문화관광부 관계자는 “학술 저작물은 일반 창작물과는 달리 법원에서도 공유를 포괄적으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보호 범위가 좁다”고 말했다. 저작권 문제에 있어서는 논문표절을 신고하더라도 자신의 저작물이 표절당했을 때 본인이 문제삼을 수 있을 뿐 제3자가 문제를 제기할 수 없다.

한 민원인의 논문 표절 제보에 대한 관련 기관의 자료를 보면 ‘민원인이 요청한 내용은 확인해드릴 수 없습니다’라고 나타나 있다. 학술 관련 단체로부터 지원을 받은 연구물이 ‘다른 연구의 내용을 표절하거나 또는 중복게재 등을 하였을 경우에 한하여는 조사 등을 할 수 있으나’라는 문구처럼 일반적인 논문 저술에 대한 문제를 제기할 만한 뚜렷한 창구가 없다. ‘학문적 감시’에 대한 내부적인 토양이 마련되지 않으면서 학계의 일그러진 풍토가 삐져나와 국제적인 망신을 당하는 사례도 있다. 2004년 1월 세계적인 과학잡지 ‘네이처’지는 영국에서 박사후 과정을 밟은 C모씨가 러시아 과학자의 논문 8건을 표절한 사실을 실었다. 이 사태로 C모씨는 D 대학에 재직중 사임했다. 2001년에는 국내 대학에 재직중인 세 교수가 표절 파문에 휩싸였다. 공동으로 제출한 논문이 해당 국제학회로부터 표절로 판정받았기 때문.

2004년에는 유명 학자인 E교수가 표절 시비에 연루돼 파장을 일으켰다. 제자의 석사논문과 비슷한 내용이 E교수와 제자 등 3인의 이름으로 저명 학회지인 F지에 실린 것. F지는 게재 다음호에서 ‘게재 취소‘ ‘연구실적으로 불인정’을 공지사항으로 알렸지만 표절 여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이 사례처럼 학계에서는 공동저자와 학위 논문의 ‘자기 복제’가 관행이 돼 일부 연구자들은 무감각한 상황에 놓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공계 계통에서 많이 이루어지던 공저가 최근 인문사회 분야에도 일상적인 현상이 됐다. 민교협 집행위원인 김정인 춘천교대 사회과교육과 교수는 “이공계와는 달리 인문·사회 분야에서는 사상 공유가 힘든 만큼 공저가 어렵다”면서 “그런데도 최근 이공계의 공동저자 논문제출 현상이 인문·사회 분야로 퍼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연구자의 논문에 지도 교수의 이름을 ‘예의상’ 넣어주는 것도 공저를 확산시킨 이유가 되고 있다. 교수 평가에서 논문의 편수를 산술화하면서 지도교수의 논문 실적을 올려줘야 하는 분위기가 조성되기 때문. 학위 논문 지도에 참여했던 지도교수의 이름을 비슷한 내용의 논문에서 공저자의 이름으로 올리는 것도 관행이 되고 있다.

자신의 박사 논문을 쪼개 몇 편의 논문으로 학술지에 싣는 ‘자기 복제’ 논문도 문제점으로 지적될 수 있다. 박사 논문을 쓰고 난 뒤 각 장과 절을 쪼개 논문 여러 편으로 생산하는 일이 학계에서는 관행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것. 여기에 대해서는 학계 내부에서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최근 G대학의 교수 임용심사과정에서는 박사 논문을 나누어 쓴 것을 인정할 수 있느냐는 문제로 잡음이 불거지기도 했다.

학계에서는 박사 논문을 쓰는 과정에 발표한 여러 논문을 모아 박사 논문에 싣는 것은 인정할 수 있지만, 박사논문을 쓴 후 여러 개의 논문으로 나눠 쓰는 것은 있어서는 안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논문조작·표절 등의 ‘학문적 범죄’는 근원적으로 각 대학에서 교수 평가와 교수 임용시 논문 실적을 양적으로 평가하는 데에서 발생하고 있다. 김정인 교수는 “경쟁력 없던 대학 사회가 경쟁적 문화로 접어들면서 일어나는 과도기적 현상”이라고 진단했다. 김 교수는 “하지만 연구풍토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평가 기준이 없는 상태에서 질적인 평가보다 양적인 요구가 앞서고 있다”고 꼬집었다.

 

논문 몇 개로 쪼개는 ‘자기복제’

 

한국학술진흥재단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연구자 자신이 입력하는 통합연구자 정보를 검색해보면 3년 사이에 무려 300여 편의 논문을 쓴 저술자도 있다. 이들은 대부분 이공계 계통의 연구자로 대다수 논문이 공저로 돼 있다. 물리적인 시간을 계산하더라도 1년에 100편의 논문을 만들기는 쉬운 작업이 아니다.

학계 내부에서는 논문의 질적 가치가 문제일 뿐 양이 많다고 해서 일방적으로 비판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에 반대하는 의견도 있다. 이명원 교수는 “인문학의 경우 1년에 1∼2편을 쓰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말했다.

대학교수 임용을 앞두고 연구실적을 부풀리기 위한 논문 양산도 문제점으로 지적받는다. H대학 I교수는 “실제로 교수 임용을 앞두고 3개월 사이에 8∼9편의 논문을 싣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특히 교수 임용을 앞두고 동일 학회의 학회지에 몇 편씩 논문을 싣는 경우는 논문 게재의 부정 의혹이 짙은 사안이다. 특정 인맥이 구축된 학회에서 학회지를 통해 제대로 평가되지 않는 논문을 게재함으로써 교수 임용 평가에까지 자동적으로 부정이 개입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17대 국회 교육위에서 논문 표절 문제를 집요하게 파헤친 열린우리당 백원우 의원은

“논문 표절과 조작은 범죄행위”라고 한마디로 정의했다. 백 의원은 “최근 불거져 나오는 표절 시비는 빙산의 일각”이라면서 “엄벌을 해서 더 이상 학계에서 이런 시비가 일지 않도록 해야 황우석 박사와 같은 사태가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