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전 : <포에티카> 4집 특집: 이제 일본문학을 읽는다. 민음사, 97.9>
탈식민주의시대의 일본문학 읽기
1. 수수께끼의 제국
"중심은 공허하다." 롤랑 바르트는 도쿄 한 복판에 위치한 왕궁을 둘러 보았을 때의 인상을 그의 직관적인 일본문화론, 또는 일본문화에 관한 주석서『기호의 제국』(1970)에 이렇게 적었다. 빌딩과 주택이 빼곡이 들어찬 거대 도시의 중심부에 인공호와 수목으로 둘러싸여 군림하는 <제국의 중심>에 부여한 '텅빈(vide)'이라는 형용사를 전쟁 전의 절대권력이 소거된 상태의 '상징 천황제'에 대한 정치적 함의를 담은 언술로 이해했을 때 이제까지 천황제에 관해 제출된 어떤 논평보다도 정곡을 꿰뚫은 것으로 평가할 수 있을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본에 대한 진지한 이해를 기대하고 이 책을 펼친 독자라면 주저없이 스스로의 <세속적인> 기대를 포기하고 '텅빈' 언술과의 선문답을 나눌 채비를 갖추는 편이 현명할 것이다. "그 중심 그 자체는 어떤 지배력을 방사하기 위해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도시의 모든 움직임에 공허한 중심점을 부여해서 영구의 순환을 강요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일견 핵심을 찌르는 예리하고도 사려깊은 통찰처럼 여겨지는 이러한 언술은 철저하리만큼 일본의 문화적, 사회구조적 실체로서의 천황, 또는 천황제라는 <의미>로부터 일탈한 층위(해체주의적 기호학의 실천)에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의 시선은 오로지 역동적인 대도시의 중심에 자리하는 '금기의 공동(空洞)'이라는 지형적 실체, 또는 공간적 기호(천황제라는 시니피에가 소거된)에만 향해 있는 것이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일본은 의미가 지배하는 서구와는 정반대로 기호가 지배하는 '기호의 제국'이었다. 암시와 생략, 내용보다는 형식을 존중하는 문화기호들로 가득찬, 기의가 증발된 '기표의 은하수'의 이국에서, 순수한 에크리튀르를 가능케하는 글쓰기의 유토피아를 발견한다.
『기호의 제국』은 저자 스스로 '침묵의 에크리튀르'라고 명명한 일본요리, 젓가락, 분라쿠, 꽃꽂이, 절하는 법, 하이쿠(俳句), 일본화, 가부키 배우의 얼굴, 정원 등의 기호표현을 통해 일본이라는 '텍스트'를 그야말로 임의적으로 <읽어> 나간 기록이다. 특권적으로 다용되는 '텅빈(vide)'이나 '무(le vide)'와 같은 단어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책을 엮어 나가는 유일한 통일적인 시점은 각각의 문화기호에 편재하는 '중심의 결여'를 향한 시선에서 찾아진다. 이는 서문에서 저자 자신이 이 책 속의 모든 것이 '의미의 상실'에 다다르기 위해 존재한다고 천명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기호의 제국』이 보여주는 철저한 탈중심화의 담론은 기독교의 신과 로고스를 중심으로 한 서양문명의 통일적인 기호체계를 흔들고, 균열을 만들고자 하는 바르트의 전략에서 나온 것이며, 그 결정적인 무기가 <중심의 결여체>로서의 '일본'이라는 텍스트였던 셈이다.
2. 타자에의 시선
1966년과 68년 두 번에 걸친 바르트의 일본 여행은 오랜 지기인 도쿄 프랑스문화원 원장 모리스 팽게(Maurice Pinguet)의 초대에 의한 것이었다. 공쿠르 형제, 마네, 드가, 고흐, 폴 클로델등 전세기의 프랑스 지식인, 예술가들처럼 바르트도 '저 건너편'에 있는 일본을 동경했다. 그러나 그는 『기호의 제국』의 서두에서 일본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전 시대의 오리엔탈리즘적인 시각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 책에서는 사람들이 역사적, 철학적, 문화적, 정치적으로 비교, 대조하는 두 <현실>로서 동양과 서양이 다루어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p. 7) 볼테르나 피에르 로티를 거명하며 미지의 아시아에 대해 기지의 언어에 의존하여 두 세계를 '구별'하고자 했던 '우리들[서양]의 자기 도취'에 대한 비판도 빼놓지 않는다. 바르트가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명백하다. 그것은 유럽이 18세기말 이후 동양에 대해 지녀 왔던 차별적 정치, 문화 이데올로기로서의 오리엔탈리즘의 초월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각에도 불구하고 바르트가 과연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이름의 서양인이 동양에 대해 갖는 공동환상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었을까? 여기서 모리스 팽게의 증언을 단서로 하여 이 문제를 검토해 보기로 한다.
그[바르트]의 만년 무렵 몇 년간 나는 파리에서 그와 수 차례 만났었다. 그 때마다 그는 내가 도쿄에서 막 돌아 온 것을 알고는 늘 조금 불안한 듯한 표 정으로 "어떤가요? 일본이 많이 변하지는 않았겠지요?"하고 내게 묻곤 했었다. 나는 농담처럼 이렇게 대답했다. "걱정할 것 없어요, 롤랑. 일본이 변하고 있는 중일지도 모르지만 프랑스는 물론이고, 슬프게도 당신도 나도 일본보다 훨씬 더 빠르게 변하고 있으니까."(팽게, 앞의 책, 36쪽)
자못 불안한 얼굴로 일본이 변하지는 않았는지 하고 묻는 과거의 여행자 바르트와 일본도 우리(프랑스)와 마찬가지로 변하고 있다고 짐짓 태연스레 받아 넘기는 체류자 팽게. 바르트의 사후에도 변함없는 우정을 간직했던 팽게가 소개한 이 한 토막의 대화는 그의 의도와는 달리 바르트와 일본 사이에 은폐되어 있던 오리엔탈리즘의 함정의 존재를 드러내 보여준다. 즉 동양은 고정화된 부동의 존재이고, 따라서 서구에 의한 조사를 필요로 한다는 서구지식인의 보편적 인식에서 고착화되어 온 여행자(서양인)/토착민(비서구인)의 이항대립의 구도가 바르트의 근심스런 표정에 배어있는 것은 아닐까? 더욱이 다음과 같은 바르트의 언급은 이러한 심증을 뒷받침해 준다. "일본은 나에게 시적 소재를 부여했고, 나는 그것을 사용해서 기호에 대한 나의 사상을 전개한 것이다." 『기호의 제국』의 출간과 관련하여 『아사히신문』(1971. 3. 9일자)과 가진 인터뷰에서의 이 발언은 오리엔탈 르네상스를 제창한 E. 키네(1803-75)의 "동양이 제안(propose)하고, 서양이 해결(dispose)한다"는 유명한 정식을 연상케 하기에 충분하다. 즉 바르트의 발언이 정보원(동양)/지식원(서양)이라는 또 하나의 이항대립 구도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으로 여겨지는 한 사이드가 제기한 "오리엔탈리스트는 <쓰는>사람이고, 동양인은 <쓰여지는>사람이다. 이것이야말로 오리엔탈리스트가 동양인에 대해서 부과한, 보다 더 암묵적인, 보다 더 강력한 구별"(Said, p. 308)이라는 비판을 비켜가기는 힘들어 보인다.
『기호의 제국』에 드리워지는 이국취미와 식민주의적 감성의 그림자는 철저한 차이화의 담론에서도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일본문화, 일본사회에 내재하는 서구와의 공통점(일본은 서양 근대주의의 '우등생'이 아니었던가!)에 관한 논급은 끝내 눈에 띄지 않는다. 일본체험을 통해 일본문화에 대한 이해를 갖게 되기 보다는 오히려 이해 불가능한 대상으로 스스로 규정한 피에르 로티처럼 바르트에게 있어서 신비하고 불가사의한 나라 일본은 어디까지나 서구의 대극적인 타자로서 현전하는 것이며, 이러한 관계는 책의 마지막까지 견고하게 유지된다. 그리고 '의미의 제국'으로서의 서양의 논리체계를 해체하려는 의도로 채택한 탈중심화의 담론이 사실은 <방법>이라는 이름의 <중심>을 축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은 지식원(서양)이라는 중심에서 또 하나의 타자를 구축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얼마전 내한한 일본의 문학평론가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은 「미와 지배--『오리엔탈리즘』이후」라는 제하의 강연에서 동양에 대한 서양(또는 일본을 포함한 제국주의)의 심미적 태도에 내재하는 식민주의의 구조를 파헤친 바 있는데, 그의 강연중의 다음과 같은 구절은 앞에서 거론했던 바르트의 '불안한 듯한 표정'에 대한 적절한 주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끌로드 시몽이, 그리고 일본을 좋아하는 프랑스인들이 사랑하고 존경하는 것은 16세기 일본의 민중미술인 '우키요에'나 '선 사상' 등에 의해 프랑스인에 게 경이의 감정을 느끼게 해준 '일본의 문화'일 뿐 현실로서 존재하고 동시에 경제적으로도 프랑스를 위협하는 타자로서의 일본은 아니다. 즉 그가 사랑하 는 것은 미적 일본, 표상으로서의 일본이며, 가능하다면 일본인이 언제까지고 그곳에 머물러 있기를 그는 원하고 있는 것이다. " (강연집 5쪽. 박유하 역)
1995년 프랑스의 핵실험에 항의한 오에 겐자부로에 대해 반론을 제기한 끌로드 시몽 역시 『오리엔탈리즘』이전에 있으며, 일본의 서예에 감동했다는 그의 언술에서 드러나는 심미적 태도와 식민지주의라는 이중 구조는 곧 자포니슴의 실체이기도 하다는 것이 가라타니의 주된 논점이다.
반 고흐는 프랑스 인상파 화가중에서도 일본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지녔던 화가로 알려져 있다. 파리에서 뛰쳐나와 아를르에 온 고흐는 청명한 공기와 선명한 색채효과를 제공하는 아를르의 자연에 접하고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마치 일본에 있는 것 같다"(서신, 469)고 썼다. 또 다른 편지에서는 "나는 자연 속으로 몰입해가면서 점점 일본의 화가처럼 되어 가겠지"(서신, 540)라고 썼고, 이윽고 그는 스스로를 일본인 승려처럼 그린 자화상을 고갱에게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고흐가 동경한 '일본'은 현실의 일본이 아닌, 어디까지나 '표상으로서의 일본'이었고, 상상속에서 형성된 서구의 대극 세계로서의 이상향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중심은 공허하다'와 같은 마치 노선사의 법어풍의 언술로 채워진 바르트의 『기호의 제국』에서 자포니슴의 현대적 변용을 목도하게 된다.
3. 자포니슴과 일본주의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 일본은 서구 오리엔탈리즘의 동점(東漸)의 종착지였다. 터어키취미(turquerie)와 중국취미(chinoiserie)의 유행에 이어, 우키요에(浮世繪)를 중심으로 한 극동의 섬나라의 미술품이 각광을 받았다. 이러한 일본취미(japonaiserie)는 이윽고 인상파, 아르 누보등 예술운동을 통해 일본미술의 조형적 특질을 창조적으로 반영하는 태도가 확산되면서 자포니슴(japonisme)이라는 이름으로 대체된다.
파리의 아르 누보 공예품 미술상 사뮤엘 빙(Samuel Bing, 1838-1905)에 의해 발간되어 자포니슴의 확산에 주도적 역할을 한 일본미술 소개 월간지의 제호는 『예술의 일본 Le Japon Artistique』이었다. 이는 '일본=예술(미)'라는 타자 이미지가 자포니슴의 확산에서 형성되어 왔음을 짐작케하는 한 예가 된다.
자포니슴과 근대화(=서양화)의 이념은 근대 이후 일본과 서구 사이의 관계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요소이다. 이들 사이를 접속하는 '미'(또는 자극)와 '지식'이라는 일방통행의 회로에서 식민주의의 전형을 발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일본문화의 특수성에 대한 도취의 시선이 외부(서구)로부터만 투사된 것은 아니다. 즉 서구인들에 의해 새롭게 '발견'된 일본의 '미'가 화려한 귀향과 함께 이번에는 내부로부터의 나르시시즘적 시선에 노출되는 경우를 우리는 근대 일본에서 생산된 일본문화론의 담론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일본화(日本畵)와 공예품 등에 나타난 일본적 조형미의 우위성을 주장한 오카쿠라 텐신(岡倉天心, 1863-1913)이나 노벨상 수상 강연에서 세계를 향해 일본적 미학의 정신적 깊이를 역설했던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그 대표적인 사례이거니와, 이러한 내부로부터의 자기도취는 때로는 일종의 문화 제국주의('일본주의')의 양상을 보인다.
서양의 정원이 대부분 좌우균제(均齊)로 만들어져 있는 데 반해서 일본의 정원은 대개 불균제인 채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불균제는 균제보다 더 많은 것, 더 넓은 것을 상징할 수 있기 때문이겠지요. 물론 그런 불균제는 일본인의 섬세하고 미묘한 감성에 의해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전제하에서의 이야기입니 다."
일본, 또는 동양의 '허공', 무는 여기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나의 작품의 주 제가 허무라고 평하는 평론가가 있습니다만, 그것은 서양에서 일컫는 니힐리 즘과는 판이합니다. 정신적인 기반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도겐(道元)의 사철 가에도 '본래의 면목'이라는 제목이 붙어있지만, 그는 사계절의 미를 읊으며 실로 심오한 선의 경지에 침잠했던 것입니다."(위의 글)
일본어 문법의 일반적 규범을 무시하면서까지 전후맥락도 없이 과도한 생략과 암시적 언술로 점철된 가와바타의 이 강연 원고는 아마도 그가 평생에 걸쳐 쓴 그 어느 글보다도 난해하다(위 번역은 의미의 원활한 전달을 위해 번역자의 과도한 개입의 산물임을 밝혀둔다). 물론 이 글의 난해함은 단지 표현상의 문제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가마쿠라 시대의 고승 도겐(道源)선사의 사철가의 인용에서 시작하여 도겐의 미의식과 선의 경지에 대한 몰입으로 끝을 맺은 이 수상연설문에는 5명의 선승과 2명의 가인(歌人)이 등장하거니와, 이들은 일본의 '미'에 대한 인식의 심화에서 오는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신비체험'의 간증에 동원되었다. 후일 오에로부터 '고립된 신비주의'라는 비판을 받게 되는 가와바타의 강연의 큰 줄기는 일본의 미적 전통이 선에 의한 정신적 승화와 접맥되어 있음을 강조한 것이었다. 오에는 가와바타의 애매한 언술의 배경을 가와바타의 미의 인식이 만년에 이르러 일본적인, 동양적인 신비주의와 합치되어 심화된 지점에서 찾고 있다. 결국 외부로부터의 이해를 차단하는 가와바타의 닫힌 담론은 '아름다운 일본의 나'를 향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에의 가와바타 비판은 니힐리즘에 가까운 고립된 일본적 미의식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가와바타의 언술이 구축하는 고립의 구조에는 앞서 인용한 일본정원 예찬론에서 보듯이 분명한 문화적 우월의식에서 비롯된 <차이화>의 자의식이 가로놓여져 있음을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의 강연 원고에 식상할만큼 인용되는 선 사상과 단시는 자신과 일본의 문학이 정신적으로도 예술적으로도 높은 수준을 보장해주는 자급자족의 문화환경 속에서 완성된 것이라는 가와바타의 자긍심을 대변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아름다운 일본의 나'--가히 '자기도취적인, 너무나 자기도취적인'(가와바타가 본문중에 거명하기도 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에 빗대어 비유하자면)이 제목이 담고있는 뜻은 '아름다운 일본'에 속한 '나'의 예술관의 신조 고백일 터이다. 바르트가 동양의 선사상을 접목한 '해체주의적 기호학의 사유실험'(정화열)의 기록 인 『기호의 제국』에서 '수수께끼의 제국'의 공허한 중심에 끝없이 매료되는 쾌락의 체험을 진술했던 것처럼, 가와바타도 세계를 향해 '미의 제국'의 공허한 '중심'에 칩거하는 열락을 설법했던 것이다. 자포니슴과 일본주의, 또는 관음(觀淫)과 자위(自慰)--이것은 일본문화를 사이에 두고 차이화의 이데올로기와 나르시시즘의 시선의 교차가 낳은 두 양태이다.
4. 교차하는 <오리엔탈리즘>
명징한 사색의 깊이와 예리한 직관으로 설파한 바르트와 가와바타의 일본문화론에는 일본이라는 <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미지의 일본>이라는 고찰의 대상을 논하면서도 조금의 손상도 가하지 않고 고스란히 <미지>의 상태로 환원하는 것이 그들의 담론의 본질인 것이다. 일본과 일본문화를 '제대로' 보고자 하는 기대에 이러한 담론들이 기여하는 바는 극히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 '저 건너편'의 타자와의 <차이>를 즐기는 바르트의 지적(관능적) 모험은 우리에게는 낯설고 사치스러울 뿐이다. 사실 오리엔탈리즘의 구조가 만들어낸 공동환상을 안이하게 공유했을 경우, 어쩌면 '외도'(관음)의 상대가 실은 우리 자신이었다는 비참한 사태를 예견해야 할 지도 모른다. 한편, 가와바타의 자기도취적 일본문화론의 중심에 내재하는 '텅빈 공백'에 동일문화권의 낯익음에 힘입어 순수하게 감정이입하기에는 우리는 간단히 '무화'시킬 수 없는 여러 절차를 두고 있다. 가령 바르트가 신성한 '무'를 발견하는 일본 왕궁의 '텅빈 중심'에서 우리는 역사적 '현실'이 말끔이 소거되고 마는 비현실적 의미작용을 경계한다. 그것은 일본문화에 대한 신비화의 언술이 곧잘 문화제국주의의 양상으로 전이되어 우리의 어두운 역사속에 부과되어 왔다는 기억에서 유래하는 생리적 시각의 발로이다.
과연 이 시대에 일본과 일본문화를 '제대로' 보는 시각이란 어떤 것일까? 지금 우리 주위에는 그간의 허기를 보충하는 수준을 넘어 포만감조차 느낄 정도로 일본과 일본문화에 대한 논평과 관찰의 기록이 넘치고 있다. 바르트 풍의, 하지만 바르트에 게는 결여된 중요한 덕목들을 갖춘 화려한 지적 퍼포먼스(이어령『축소지향의 일본인』)에서 안이한 민족주의와 생리적 거부감에 호소한 주관적(또는 (주정(主情)적) 관찰 기록(전여옥『일본은 없다』)에 이르기까지 전례없는 일본론 르네상스를 구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풍요로움의 한 가운데에 머무르며 웬지 모를 '공허'함을 느낀다. 이 감정은 기존의 논의들이 핵심에 이르지 못하고 우회의 궤도에 머무르고 있다는 불만에서 유래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관찰자의 시선을 제어하는 중추기능의 확고부동함에서 '공허'를 느낀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는 기존의 논의들의 상당수가 우리가 조선시대 이래 지녀왔던 일본에 대한 타자 이미지(대개는 부정적인)에 대한 제각기의 방식에 의한 주석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말한다.
關白 앉은 데가 멀고어두어서/ 얼골은 못 보아도 흰옷을 입었더라/ 使臣네 않안 데는 가깝고 오랜지라/ 자세히 바라보니 낯이 적고 턱이 빠고/ 정신은 있이난대 거동이 경삽하고/ 머리를 흔드기며 접책을 치쳐보고/ 첩키를 자로 히야 진중치 아냐보고/ 前後에 열 일곱 놈 뫼시고 않았고나 (김인겸『일동 장유가』)
제 형이 죽게 되면 형수를 겨집 삼고/ 다리고 살게 되면 착다 하고 기리지만 / 제 아우 길렀다고 제수난 못 한다네/ 예법이 없어 금수와 일반이다 (같은 책, 147쪽)
그로테스크한 풍모에다 지적, 도덕적으로 열등한 타자--이것이 당시 조선의 엘리트 관료로 구성된 조선통신사 일행이 지니고 돌아온 일본인에 대한 스테레오 타입이었다. 왜의 야만적인 무력에 의해 침탈의 수모를 겪긴 했지만, 중국문명이 모든 가치의 척도였을 당시 통신사 일행은 중심문명의 <모범적인 우등생>으로서 변방의 섬나라에 건너 갔다. 당시 기록된 기행문은, 일부 예외적인 기록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야만', '금수', '돈견(豚犬)' 등의 단어에서 나타나듯이, 문명의 생산, 전달자로서의 <주체>의 시선에 투사된 열등한 타자에 대한 비하의식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열 두 차례에 걸친 조선통신사의 항해가 '자기 변혁'의 계기가 아닌 <자기=문명/타자=아만>이라는 정식(定式)의 '자기 확인'의 절차였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찾아진다고 할 때 웬지 모를 착잡한 심경에 빠져든다. 이 착잡함은 우리가 만든 정식이 훗날 도치된 형태로 우리와 일본과의 관계에 기능한다고 하는 역사의 아이러니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된다.
19세기 말엽 문명의 중심이 중국에서 서양으로 바뀌고 난 후 일본에 파견된 신사유람단등 구한말의 사절단 일행은 이번에는 거꾸로 <근대화의 우등생>으로부터 투사되어지는 경멸의 시선에 노출되어야 했다.
1909년 4월 26일 월
흐림. 한국관광단 백여명 내일하다. 여러 신문의 기사는 모두 경멸의 논조. 자신들이 외국인에게 경멸당하고 있는 것은 잦혀놓는 꼴이다.(중략)
만일 외국(서양)인 관광단 백여명에게도 같은 논조로 쓸 수 있는 신문기자 가 있다면 가상할 노릇이다.
일본 근대문학의 대표적 작가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의 일기중 한 토막이다. 문명개화의 물결 속에서 서양을 찬미하고 아시아를 비하하는 당시 일본의 시대풍조를 개탄해마지 않는 나쓰메의 모습이 담겨 있는 대목이다. 영국 유학중 아시아인에 대한 멸시와 서양의 문화적 제국주의에 반발하여 아시아인으로서의 자기주장을 문학적 출발의 토대로 삼은 나쓰메답게, 그의 문집에는 일본의 팽창정책이나 경박한 민족적 우월의식을 비판하는 발언이 곳곳에 보인다. 예컨대 1907년 일제의 강압에 의한 고종의 퇴위 소식에 접하고 "일본 전국에 조선의 국왕을 동정하는 사람은 나 한사람뿐이겠지"라고 제자에게 보낸 편지에 쓴다든가, 런던 유학시절 동료 일본인이 길거리에서 만나는 영국인들이 자신을 중국인으로 착각하는 것에 불평한 것을 두고 "중국인은 일본인보다 훨씬 명예로운 국민이다. 단지 불행하게도 현재 국운이 침체일로에 있을 뿐이다. 자각있는 사람은 일본인으로 불리우는 것보다 중국인으로 불리우는 것을 명예로 삼아야 할 것이다"라고 일기(1901. 4. 9)에 적은 것은 명치 일본의 '비판적 지성'으로서의 그의 면모를 엿보게 해주는 대목이다.
그러나 타자의 시선으로 자기를 비추어 보는 평등적 사고에 투철했던 소세키 역시 당시의 식민지 만주와 조선을 주유하는 여행자의 입장이 되었을 때, 그가 배척해마지 않았던 제국주의적 우월감을 승인하는 자기모순을 노정하고 만다. 한달 반에 걸친 만주, 조선 여행기「만한(滿韓) 여기저기」는 상당부분이 일본인 지기들(물론 모두가 식민지 지배의 첨병들이다)과의 교유담이나 이국적인 풍경과 풍물에 대한 묘사로 채워져 있지만, 그러나 드문드문 보이는 중국인에 대한 기술에는 동양인으로서의 자각을 주창했던 나쓰메의 필치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중국인에 대한 모멸의 표현이 거리낌없이 드러난다. '정말이지 더러운 국민', '냄새나는', '시끄러운'과 같은 형용이 그것이거니와, 이것은 물론 동서양을 막론하고 경멸적 타자 이미지의 구축에 동원되는 상투적 언술에 해당한다.
항만에는 많은 사람들이 늘어 서 있었다. 그렇지만 그 대부분은 쿠리[하 층 노동자]로서 한 명만 보아도 더러운데, 둘이 모이면 한층 흉물스럽다. 이렇 게 많은 인간이 뭉쳐 있으면 꼴사납기 이를 데 없다. 나는 갑판위에 서서 먼 발치에서 이 군중들을 내려다보면서 마음 속으로 "허, 이거 기묘한 곳에 도착 했는데"하고 생각했다. (『전집』8권, 160쪽)
나쓰메가 중국에 첫 발을 내딛는 대련항에 도착해서 마치 걸리버의 소인국(小人國)에라도 온 것 같은 느낌으로 첫 인상을 기술하고 있는 것은 놀라움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경영의 선봉인 남만주철도주식회사 총재 나카무라 제코(中村是公)의 초대로 만주에 온 그는 일본에 의한 '식민지 경영'이 한창인 곳곳을 둘러 보며 평소 날카롭게 비판했던 일본의 '외발(外發)적' 문명개화, '수박 겉핥기 식'의 근대화가 식민지에 '고도로''이식'되는 것을 일본의 신문에 보고하기도 한다. 물론 51회에 걸친 지루할 정도로 장황한 이 기행문의 어디에도 식민지의 '현실'에 대한 성찰은 보이지 않는다. 만주에서도, 조선에서도 나쓰메는 유유자적한 여행자로서의 본분에 충실할 뿐이다.
지금 경성에 와서 매일 조선사람을 보고 지내네. 경성은 산이 있고 소나무 가 있어서 좋은 곳이지. 일본인이 많아서 내지(內地)에 있는 것과 진배없다 네." (엽서. 1909. 10. 9. 『전집』14, 778쪽)
조선에서는 지붕위에 고추를 말리고 있었다. 소나무 사이로 보이는 외딴 집 이 가을 하늘 아래서 불타는 듯이 새빨갰다."(「만한 여기저기」『전집』8, 239쪽)
산, 소나무, 흰 옷....일본 제국주의의 팽창을 위구하던 사려깊은 문명비평가의 시선은 어느덧 이국적 풍경에 매료되는 여행자의 시선으로 대체된다. 서구제국주의의 추종이라고 하는 일본의 근대화의 모순은 <풍경>이라는 차단막에 가려 시야에서 지워지는 것이다. 런던유학에 이은 두 번째 외국 나들이인 만주, 조선여행이 그의 문학에 준 자양분은 오로지 여행후 쓰여진 소설에 모험과 재생의 땅인 대륙(식민지)을 방랑하는 <낭만적> 작중인물의 창조로 결실을 맺었다.
나쓰메를 비롯한 근대 일본작가들의 상당수가 식민주의적 시각을 극복하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냈다고 한다면, 일본 근대평론계의 최고봉으로 일컬어지는 고바야시 히데오(小林秀雄)의 예는 오카쿠라 텐신과 마찬가지로 스스로에게 투사된 서구 오리엔탈리즘의 구도를 그대로 아시아에 전이한 경우에 해당한다.
석굴암의 조각은 자주 사진으로 보았지만, 천장이 없는 사각의 전실에서 천 장을 반구형으로 쌓은 원형의 후실에 들어가 거대한 대좌에 앉은 통채로 새겨 낸 석가상을 올려다 보았을 때는 역시 놀라고 말았다. (중략)석가상에는 그런 것을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 의연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중략)
보살에서 비구상으로 눈길을 옮기기도 하고 또 본존의 체구를 올려 보고 있는동안 이 좁고 둥근 방에 가득찬 뒤범벅된 아름다움에 차츰 피곤해졌다. (중략) 아름다운 것을 보고 왜 이렇게 피곤해지는 것일까 하는 질문이 문득 마음속에 떠올랐다. 우문이라고 판단할 여유도 없이 "물론 석굴암의 조각에는 죄가 없지" 라는 생각이 불현듯 스쳐갔다.
중일전쟁 발발 이후부터 패전에 이르기까지 고바야시 히데오는 종군기자 또는 문예총후운동의 강연회 연사로서 만주, 조선 등을 6차례 여행했다. 위 글은 성전(聖戰)의 선전부대의 일원으로서 식민지에 파견된 고바야시가 두 번째 강연여행중 짬을 내어 경주의 불국사, 석굴암을 돌아 본 뒤 『문예춘추』에 현지보고 형식으로 게재한 에세이다. 비슷한 시기에 쓰여진 전쟁이라는 현실상황과 관련된 사회시평적 글과는 달리 랭보와 도스토엡스키에서 모차르트와 고흐까지 통효한 고바야시답게 직관적인 심미안과 예술적 사색의 깊이를 보여주는 글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글의 이해와 관련해서 자주 거론되는 것이 석굴암 불상의 아름다움에 '피곤함'을 느꼈다는 기술이다. 그러나 이어서 나오는 "나에게 부처가 없어서 피곤한 것이다"라는 고바야시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독자의 입장에서 '미'의 체험이 '피곤함'이라고 하는 생리적 감각으로 표출된다고 하는 '당돌'한 전개를 논리적으로 정확히 포착하기는 좀처럼 어려워 보인다. 이 난문에 봉착하여 우리는 잠시 19세기말 교토의 고풍스런 사찰을 찾은 벽안의 이방인의 기행문을 떠올려 보기로 하자.
마지막으로, 이렇게 생각하면 피곤하고 성가시게 여겨지지만, 이 기대들, 이 미소들, 이 화려한 황금색의 광채, (중략) 이러한 모든 것이 몇 시간 전부터, 며칠 전부터, 몇 계절 전부터, 몇 년, 몇 세기 전부터, 그리고 천년 전부터 이 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피에르 로티 『가을의 일본풍물』)
일관되게 <구별>의 시각에서 일본문화의 '기묘함'을 적어내려 간 로티는 교토의 산주산겐도(三十三間堂) 기행에 이르러 '경이중의 경이'라는 찬탄을 감추지 않는다(종속적인 대상을 비하함과 동시에 미화하는 것은 오리엔탈리즘적 담론의 전형적 유형이다). 그러나 여기서 로티는 일본의 불교문화의 '경이'를 '피곤하고 성가신'이라는 생리적 감각의 회로를 통해 표출하고 있거니와, 이 '피곤하고 성가시다'는 생리적 감각은 "일본과 서구사이에 가로 놓여진 발생의 상이가 커다란 심연을 파고 있다"는 로티의 말처럼 좁혀질 수 없는 문화적 단절에서 유래하는 것처럼 보인다.
고바야시는 동경대 불문과를 졸업하고 수많은 프랑스의 시와 소설을 번역한 불문학도이다. 더구나 로티의 이 기행문은 아쿠타가와의 단편『무도회』의 저본이 되었을 정도로 일본 문인들 사이에서 많이 읽혀졌다. 이렇게 볼 때 고바야시 히데오의 당돌한 '피로감'이 로티의 '피곤하고 성가신' 느낌으로부터 이식되었을 것이라는 가정은 단순한 혐의 이상의 확증에 가까운 심증을 수반한다.
그렇다면 석굴암의 좁은 방에서 고바야시에게 엄습해 온 '피곤함'은 로티와 같이 문화적 단절감에서 유래한 것일까? 아마도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과 일본의 불교문화에 좁혀질 수 없는 '단절'이 존재한다고는 생각키 어려운데다 우리는 석굴암 본존불의 '의연한 아름다움'에 매료되는 고바야시의 모습을 그의 글의 행간에서 가까히 들여다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피로감의 근원을 '본존불의 조각가가 가지고 있던 부처'가 자신에게는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찾는다. 또 "부처가 결여된 미, 그런 사태를 도대체 상상할 수 있는가?"라고도 자문한다. 그럼에도 자신이 석굴암의 '기묘한 아름다움'을 '확실히 느꼈다'는 자각은 뚜렷하다. 결국 그가 말하고자 했던 것을 여기에서 충분히 저작할 여유는 없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피곤함'은 로티의 기행문에서 유래하고 있으며 '부처가 없'기 때문이라는 부연은 로티의 텍스트에 대한 주석의 성격도 지닌다는 점이다.
고바야시는 경성 부민관에서 가진 강연(1940. 8. 6)「문학과 나」(『京城日報』1940. 8. 25)에서 서양의 지식인들이 걸핏하면 게이샤나 후지산, 할복등과 같은 유형화된 일본 이미지를 들먹이는 것을 '천박'하다고 비판했다. 이 발언은 게이샤나 후지산을 '신비롭고' '아름다운' 이국적 풍물로 묘사하는 서양의 담론에 배여있는 제국주의적 이데올로기에 반발하는 고바야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서구의 문화적 우월주의에 대한 평소의 반감에도 불구하고 만주, 조선을 여행하는 고바야시 역시 나쓰메와 마찬가지로 일본문명과 전통문화에 대한 확신과 자부를 드러낸다. 특히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식민지 조선의 문화를 논하는 고바야시의 필치는 그 스스로 용인할 수 없었을 것이 분명한 피에르 로티의 일본에 대한 오리엔탈리즘적 담론을 고스란히 차용하고 있는 것이다. 문예총후운동의 강연을 통해 '성전'에 임하는 대동아공영권의 제휴를 역설하는 한편, 식민지의 전통문화가 빚은 '미'를 칭송하는 고바야시--이 당대 일본의 일급지식인의 모습에서 서구 오리엔탈리즘의 재판으로서 <역(逆)오리엔탈리즘>의 존재를 목격할 수 있음과 동시에 당시 일본이 선전했던 대동아 공영권의 명분이 제국주의적 침탈을 위장하기 위한 허울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나쓰메가 쓴 조선과 만주에 대한 글에는 능동적 주체로서의 일본과 수동적 타자로서의 만주, 조선이라는 식민주의의 구도가 짙게 깔려 있었다. 일본은 <문명의 주체>, 또는 대행자이며, 아시아는 <계몽의 대상>으로서만 존재한다. 그는 서양을 결코 '표준'으로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그 자신이 아시아에 대해 취했던 입장과의 모순을 끝내 해결하지 못했다. 그는 분명히 명치일본이라고 하는 체제 안에서 뛰어난 비판적 지성이었지만, 그의 비판의식이 민족이나 국가와 같은 단위와 얽어질 때는 어쩔 수 없이 체제 내의 존재로서의 한계를 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식민주의 그 자체가 근대국가의 하나의 전제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승인한다 하더라도, 나쓰메가 보여준 모순은 고스란히 일본의 왜곡된 근대사의 암부에 짙은 음영을 더하는 것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있을 수 없다.
5. 변경으로부터의 보고
일본을 동양에 있어서의 '문명의 선구자'로 자리매김한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탈아론』은 <의사(擬似)중심>의 지향이라는 일본의 국가목표의 시점이다. 이 속에서 아시아인(그의 표현에 의하면 '동방의 악우<惡友>')을 평하는 데 동원된 고루, 파렴치, 오만, 비굴, 잔인과 같은 언술은 실은 '부정하고 싶은' 자기 이미지에 다름 아니다. 즉 후쿠자와 등이 만들어 낸 갖은 악덕으로 얼룩진 아시아라는 거울은 서구와의 관계에 있어서의 열등성을 우월성으로 전환시키기 위한 장치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장치가 제국주의적 폭력성을 정당화하는 근거를 제공한 것은 역사에서 증명된 사실이다. 오에는 일본의 근대화의 '애매한 진행'이 아시아의 침략자와 서구의 추종자로서의 분열된 두 모습을 낳았다고 진단한다. 나쓰메를 분개하게 한 한국사절단에 대한 야유의 논조에 깔려 있었던 것 역시 '서양>일본>조선(아시아)'의 구도였고, 이는 조선의 지식인들이 공유했던 '명(明)>조선>일본'의 세계인식과 정확히 맞아 떨어지는 것이기도 했다. 여기에서 근대 이전과 근대이후 한국과 일본 두 나라 모두가 정치적, 문화적 패권주의의 대리인 역할을 수행하는 것에서 자기정체성을 모색했다는 자화상이 불거져 나온다.
오에 등 전후 모더니스트들은 이러한 일본 근대의 모순이라는 정신적 부채를 스스로의 문학적 자산으로 삼고 출발했다. 오에가 일관되게 추구해 온 것은 『탈아론』이후 제국주의적 팽창의 근거를 마련한 <친-중심/탈-주변>의 패러다임의 전환이었다. 그가 고향 시코쿠(四國) 산골짜기의 숲속(변경)에 작가로서의 근거를 설정한 것은 왜곡된 근대화의 원점이라 할 수 있는 천황제(중심)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일본의 변경으로서 제국주의의 피해자가 된 오끼나와와 '변경의 문학으로서의 한국문학'(특히, 김지하의 시)을 발견하고 일본인=아시아인 작가로서의 자각을 새롭게 했다는 그의 일종의 <탈구입아(脫歐入亞)>의 신조고백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그의 변경에의 지향은 일본의 근대가 남긴 정신적 부채를 상환하고자 하는 정치적 의지의 한 형태로 이해될 수 있다.
<중심/변경>이라는 패러다임은 오에의 문학세계 뿐만 아니라 오늘날 일본문학의 큰 흐름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시점을 제공한다. <망명문학>이라 명명해도 좋을 성 싶은 탈중심의 조류가 다양한 변경의 토포스(topos)를 구축하며 1980년대 이후 일본문학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 시마다 마사히코(島田雅彦), 이케자와 나쓰키(池澤夏樹)등 1950년대 이후 출생 작가들이 그 주축을 이루거니와, 이들은 근대문학의 성립이래 <중심>으로 여겨져 왔던 것으로부터의 원심력이 작용하는 곳에서 스스로의 존재근거를 마련한다.
하지만 이들과 오에와의 사이에는 변경에의 지향이라는 공통분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성격은 사뭇 다르다. 오에의 변경의 토포스가 부권적 지배구조의 근원으로서 천황제라는 중심으로부터 '이반'하고 '대치'하는 '반'중심(권력)의 사상이라고 한다면, 위 작가들의 경우는 '일본', '일본어', '일본근대문학'이라고 정주(定住)의 울타리로부터 '일탈'하고 '도피'하는 포스트모던적 '탈'중심의 사고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탈일본(어), 탈장르, 탈정전, 탈집단, 탈전통....등 접두어 '탈'로 수렴되어지는 이들의 유목민적(아사다 아키라 풍으로 비유하자면) 이데올로기는 '일본문학의 고립'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의지임과 동시에 세계와 원활한 소통을 가능케 하는 보편언어에의 이상을 담고 있다.
하루키가 미국의 작가 제이 매키너니와의 대담에서 말한 다음과 같은 발언에는 전 시대의 가와바타나 다니자키 준이치로(谷崎潤一郞)와 같은 작가들에 의한 일본문화의 특수성의 주장에 숨어 있는 문화 제국주의의 발상에 대한 경계가 반영되어 있다.
다니자키는 일본어는 영어나 다른 서양어와는 완전히 다르며, 그것은 특수 하고 여러 가지 점에서 서구 언어보다도 우수하다, 일본어의 아름다움이 잘 보전되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는데, 이것은 그가 일종의 국수주의자였다는 사 실을 말합니다. 다니자키는 비범한 재능을 소유한 위대한 작가이긴 하지만 나 는 그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한 언어가 다른 언어보다 우월하 다는 논리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죠."
마사오 미요시는 하루키 등 전후에 출생한 작가들의 '역사적 진실성의 포스트 모던적 소거'를 비판한 바 있다. 물론 이들이 오에와 같이 과거 역사에 대한 부채의식을 자신들의 문학에 진지하게 투영하지는 아니지만, 그들은 그에 앞서 일본의 근대문학사를 통해 문화 제국주의적 자기도취의 흔적이 스며든 일본어를 스스로의 작품세계 속에서 소거하는 작업을 우선 과제로 삼는다. "우리들은 미시마(三島由紀夫)가 보여준 미학과 세련된 언어 구사를 높이 평가합니다. 그러나 그런 시대는 지났습니다. 이 시대를 사는작가로서 우리가 하고 있는 작업은 고립의 장벽을 허무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우리의 언어로 세계의 독자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니까요."
일본문학의 고립을 벗어나기 위해 이들이 지향하는 바는 '새로운 형태의 일본어의 창조'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새로운 형태의 일본어'란 무엇을 말하는가. 이게자와 나쓰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끼리끼리만 통하는 말을 쓰지 않는 것. 되도록 보편어--지금 세계에 보편어 가 있다고 한다면 거기에 맞춰서 쓰는 것. 타협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적이지 않은 것을 배제하는 것. 일본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을 배제하는 것."
'일본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을 배제'한다 함은 아마도 하루키가 말하는 모국어인 일본어를 '의사(擬似) 외국어화해서' 자기의식내에 있는 일본어의 '생래적 일상성을 회피'한다는 발언과 상통하는 것이리라. 일본어를 의사외국어로 간주하여 창작하는 것을 통해 '자기와 언어와의 괴리를 조장, 확대'하여 '다원화된 자기'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본어와 외국어와의 차이가 축소된 일종의 '인공언어'에 의한 표현을 통해 고립을 회피하고 세계와 교감하고자 하는 그들의 이상은 요즈음 일본의 인문비평에서 자주 거론되는 '크레올주의(Creolism)' 의 '혼혈의 이념'과 지근 거리에 존재한다.
하루키 등과 그 성격에 있어서는 상이점이 있지만 오에 역시 일본문학의 지향점을 '세계언어의 구상'에서 찾고 있다. 오에 겐자부로는 가와바타의 수상강연 '아름다운 일본의 나'를 패러디한 '애매한 일본의 나'에서 외부의 이해를 차단하고 사회, 문화적 고립을 가져오는 애매함의 극복이라는 과제를 제기했다. 그리고 그의 후속 세대들은 그 과제를 '공허한 중심'을 에워싸고 있는 일본과 일본어라는 울타리를 월경하는 데서 부터 실천에 옮기고 있는 듯이 여겨진다. 순혈에서 혼혈로, 수렴에서 방사(放射)로 중심 이동중인 일본문학의 지난 100년간의 변천 과정은 그 자체로서 탈식민주의적 글읽기를 유혹하는 흥미진진한 텍스트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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